서울 중구 인현동 일대 충무로 인쇄골목은 한때 대한민국 인쇄산업의 심장이었다. 영화 포스터와 전단, 관공서 인쇄물, 수출 서류, 명함과 카탈로그까지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흔적을 이곳이 찍어냈다. 1980~1990년대에는 수천 개의 인쇄업체와 수만 명의 종사자가 모여 국내 최대 인쇄산업 클러스터를 형성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전혀 다르다.디지털 전환으로 종이 인쇄 수요가 급감했고, 온라인 광고와 전자문서가 인쇄물을 대체하면서 골목 곳곳에는 빈 점포가 늘어나고 있다. 노후 건물과 좁은 도로, 열악한 주차 환경은 새로운 기업과 젊은 인력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가 됐다. 수십 년 된 건물에서 영세업체들이 버티고 있지만 산업 경쟁력을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많다.
물론 충무로 인쇄골목은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공간이다. 하지만 역사 보존만으로 지역경제를 살릴 수는 없다. 산업이 살아야 골목도 살아남는다.
최근 서울시는 충무로 43번지 일대를 중심으로 도시정비형 재개발 정비구역을 지정하며 인쇄·영화·영상산업 기능을 유지하는 복합개발 계획을 확정했다. 업무시설과 문화시설, 산업지원시설을 함께 도입하고 관련 산업을 유지하는 사업에는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향이다. 이는 단순한 철거가 아니라 산업을 유지하면서 도시 경쟁력을 높이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보다 과감한 접근도 필요하다.인현동 일대는 소규모 필지가 지나치게 많고 도로 폭이 협소해 개별 건축만으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부분적인 리모델링이나 소규모 재생사업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쉽지 않다. 결국 대규모 재개발을 통해 도로와 기반시설을 정비하고 첨단 인쇄, 디자인, 콘텐츠, 영상산업이 함께 입주하는 복합 산업지구로 탈바꿈해야 한다.
특히 AI와 디지털 콘텐츠 시대에는 단순 인쇄업만으로는 생존이 어렵다. 디지털 인쇄, 패키징, 출판 콘텐츠, 영상 제작, 디자인, AI 기반 편집과 출력 서비스까지 융합된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과거의 영광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미래 산업으로 전환하는 것이 생존 전략이다.
재개발이 곧 역사 말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충무로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보존하면서도 현대적인 산업 인프라를 갖춘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진정한 도시재생이다.
충무로 인쇄골목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이제는 낡은 산업단지를 유지할 것인지, 미래형 콘텐츠·문화산업 거점으로 도약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PJ호텔 인현동 일대의 과감한 재개발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시대적 과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