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빛 김치를 붉게 물들인 고추…한식의 맛을 바꾼 300년

오늘날 고추는 한국 음식을 상징하는 식재료다. 김치와 고추장부터 찌개, 무침, 볶음, 장아찌에 이르기까지 고추가 들어가지 않는 음식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한국인이 붉고 매운 음식을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고추의 원산지는 중앙·남아메리카 지역이다.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 이후 유럽으로 전해졌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의 해상 교역망을 따라 아시아로 확산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을 거쳐 동아시아 식문화에 자리 잡았다.

한국 고추의 정확한 전래 시기와 경로는 지금도 논쟁의 대상이다.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고추가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사이 한반도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일본을 거쳐 전래됐다는 설과 중국을 통해 유입됐다는 설이 함께 제기돼 있다.

고추가 일본군이 조선인을 해치기 위해 가져온 독초였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졌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사료는 없다. 전쟁과 전래 시기가 겹치면서 후대에 만들어진 속설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에서 고추의 존재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초기 기록은 이수광이 1614년 펴낸 ‘지봉유설’이다. 책에는 남만초가 일본에서 들어와 왜개자라고 불렸으며, 당시 사람들이 이를 재배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술집에서 매운맛을 내기 위해 고추를 소주에 넣었다가 사람이 죽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17세기 초 고추가 이미 조선에서 재배되고 일부 식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당시에는 고추를 일상적인 양념보다 독성이 강하고 낯선 외래 식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문헌에는 고추를 고초, 번초, 남초, 남만초, 왜초, 당초 등 여러 이름으로 기록했다. 고추를 뜻하는 ‘고초’가 발음 변화를 거쳐 오늘날의 ‘고추’가 됐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일각에서는 조선 전기 문헌에 등장하는 ‘초’나 ‘고쵸’를 근거로 고추가 임진왜란 이전부터 한반도에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옛 문헌의 ‘초’는 산초나 후추류를 포함한 매운 향신료를 폭넓게 가리킬 수 있다. 해당 기록을 오늘날의 붉은 고추로 단정할 수 있는지를 놓고 학계의 견해가 갈린다.

고추가 들어왔다고 해서 곧바로 한국 음식 전체가 붉어진 것은 아니다. 18세기 초 홍만선이 편찬한 ‘산림경제’에 소개된 김치 조리법에는 고추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 김치는 무와 오이, 배추 등을 소금에 절이거나 마늘·생강·겨자·산초 등을 넣어 발효한 형태가 중심이었다.

김치에 고추를 사용한 구체적인 기록은 18세기 중반 이후 나타난다. 유중림이 1766년 펴낸 ‘증보산림경제’에는 무김치에 고추와 천초, 겨자 등을 넣는 방법과 오이에 칼집을 내고 고추와 마늘을 넣어 삭히는 방법이 기록돼 있다. 오늘날 총각김치와 오이소박이를 연상시키는 조리법이다.

고추는 김치의 맛뿐 아니라 보존 방식도 바꿨다. 고추의 매운맛과 향이 젓갈의 비린내를 줄여주면서 채소와 젓갈을 함께 사용하는 김치가 발달할 수 있었다. 마늘과 생강, 파, 젓갈, 고춧가루가 결합한 양념 김치는 조선 후기부터 점차 확산했다.

오늘날과 같은 통배추김치가 전국적인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더 뒤의 일이다. 결구배추의 재배 확대와 고춧가루 생산 증가, 젓갈 유통 발달 등이 맞물리면서 19세기 이후 붉은 배추김치가 보편화했다. 지역과 계층에 따라서는 백김치와 동치미 같은 고추 없는 김치도 계속 이어졌다.

고추장은 고추가 한국의 기존 장 문화와 결합해 탄생한 발효식품이다. ‘증보산림경제’에는 메줏가루와 고춧가루, 찹쌀가루를 간장에 개어 만드는 고추장 조리법이 실려 있다. 당시 고추장은 지금보다 고춧가루 비율이 낮고 메주 맛이 강한 장에 가까웠다.

1815년 빙허각 이씨가 쓴 ‘규합총서’에는 고추장 제조법이 더욱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이후 찹쌀고추장과 보리고추장, 밀고추장 등 지역의 곡물과 기후에 맞춘 다양한 고추장이 발전했다. 고추는 간장과 된장 중심이던 한국 장류에 새로운 축을 더했다.

고추의 확산은 농업과 식재료 유통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농가에서는 붉게 익은 고추를 수확해 햇볕에 말리고, 이를 빻아 고춧가루로 저장했다. 건고추는 장기간 보관과 운송이 가능해 전국적으로 유통될 수 있었다. 영양과 청송, 음성, 괴산, 임실 등에서는 지역 환경에 적응한 재래종과 특산 고추가 발달했다.

풋고추는 된장이나 고추장에 찍어 먹었고, 홍고추는 양념과 고명으로 사용했다. 고춧잎은 나물과 장아찌가 됐으며 건고추는 김치와 고추장, 찌개, 볶음 요리의 기본 재료가 됐다. 한 식물의 열매와 잎, 가루, 발효물이 모두 음식에 활용된 것이다.

고추가 한국 음식에 남긴 가장 큰 변화는 단순히 매운맛을 더한 데 있지 않다. 고추는 기존의 소금 절임과 장·젓갈 발효 기술에 결합해 김치와 고추장이라는 독자적인 음식 문화를 완성했다. 외래 작물이 조선의 기후와 농업, 발효 기술을 만나 한국적인 식재료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한국 음식은 처음부터 붉고 매웠던 것이 아니다. 17세기에 낯선 외래 작물로 등장한 고추가 18세기 김치와 장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19세기 이후 대중의 밥상으로 확산하면서 오늘날 한식의 색과 맛을 만들었다.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붉은 한식은 오랜 토착 음식문화와 새로운 식재료가 만나 끊임없이 변화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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