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류 전쟁’…하시모토 류타로와 오자와 이치로가 벌인 일본 보수정치 최대 권력투쟁네 대하여

‘이치류 전쟁(一龍戦争)’은 일본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권력투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자유민주당(자민당) 내 실력자였던 하시모토 류타로와 오자와 이치로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약 10년 동안 벌인 정치적 대립을 의미한다. 명칭은 두 사람 이름의 끝 글자인 ‘이치(一)’와 ‘류(龍)’를 합쳐 붙여졌다.

두 사람의 대립은 단순한 개인 간 경쟁이 아니라 자민당 최대 파벌이었던 다케시타파의 주도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이자, 일본 정치가 55년 체제에서 연립정치 시대로 전환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갈등의 출발점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크루트 사건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가 퇴진한 이후 자민당 차기 지도부를 둘러싼 경쟁이 시작됐고, 당시 간사장이던 하시모토 류타로의 총재 도전을 오자와 이치로가 사실상 저지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됐다.

당시 하시모토는 다케시타 노보루 계열, 오자와는 가네마루 신 계열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의 경쟁은 개인적 대립을 넘어 다케시타와 가네마루 두 거물 정치인의 세력 다툼이라는 성격도 함께 지녔다.

결정적인 분열은 1992년 가네마루 신이 정치자금 스캔들로 퇴진하면서 발생했다. 다케시타파 후계자를 놓고 하시모토는 오부치 게이조를, 오자와는 하타 쓰토무를 각각 지원했다. 결국 오부치가 승리했고, 패배한 오자와와 하타는 파벌을 이탈해 개혁포럼21을 결성했다. 이는 자민당 최대 파벌이 처음으로 양분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오자와는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해 신생당을 창당했고, 야권 세력을 규합해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 출범을 주도했다. 자민당은 1955년 창당 이후 처음으로 정권을 잃었으며, 일본 정치는 본격적인 연립정권 시대로 접어들었다.

반면 하시모토는 자민당에 남아 재건 작업을 이끌었다.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와의 협상을 통해 자사사 연립정권 성립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1995년 자민당 총재에 선출됐다. 이어 1996년 총리 지명선거에서 오자와를 꺾고 제82대 총리에 취임하면서 권력투쟁의 우위를 점했다.

총리 취임 이후에도 두 사람의 대결은 계속됐다. 주택금융전문회사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직접 협상을 벌인 이른바 ‘이치류 회담’은 당시 일본 정치권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후 국회에서는 정치자금 문제와 증인 채택 등을 둘러싸고 여야 간 극한 대립이 이어졌고, 하시모토와 오자와는 일본 정치를 대표하는 라이벌로 자리 잡았다.

1996년 중의원 총선에서는 하시모토가 정권 유지에 성공한 반면, 오자와가 이끌던 신진당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거두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7년 도쿄도의회 선거 참패 이후 신진당은 급속히 분열했고, 오자와는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탈당해 자유당을 창당했다.

사실상 이 시점부터 이치류 전쟁은 하시모토의 승리로 마무리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하시모토 역시 1998년 참의원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며, 후임으로 오부치 게이조가 취임했다.

흥미로운 점은 치열하게 대립했던 두 사람이 이후에는 손을 잡았다는 것이다. 1998년 자유당과 자민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면서 오자와는 자민당과 협력했고, 자자연립은 이후 공명당까지 참여한 자자공 연립정권으로 확대됐다.

이후 두 사람의 정치 인생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하시모토는 2005년 정계를 은퇴했고, 2006년 7월 별세했다. 오자와는 민주당 대표를 맡아 2009년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이끌었지만 끝내 총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일본 정치권에서는 이치류 전쟁을 다나카 가쿠에이 시대 이후 최대 규모의 보수정치 권력투쟁으로 평가한다. 또한 이 대립은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를 흔들고 연립정치 시대를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일본 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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