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차기 총리로 유력한 기독민주당(CDU) 프리드리히 메르츠 대표가 정치권 일부에서 제기하는 독일의 자체 핵무장론을 강하게 일축했다.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을 거론하며 “미국 핵우산을 더는 신뢰할 수 없다”며 독일의 핵무기 개발·보유를 주장하고 있다.
9일(현지시간) AFP통신에 따르면 메르츠 대표는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독일은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할 수 없으며, 핵무기 보유가 허용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메르츠 대표가 이끄는 CDU는 지난 총선에서 집권 사회민주당(SPD)을 제치고 원내 1당이 됐으며, 자매 정당인 기독사회당(CSU)과 함께 차기 총리직을 예약한 상태다. CDU/CSU 연합은 원내 3당이 된 SPD와 연립정부 구성 협상을 진행 중이다.
메르츠 대표의 발언은 극우 AfD의 주장에 대한 반박 차원에서 나왔다. 트럼프 행정부 이후 미국이 유럽 동맹국들과 거리 두기에 나서면서, AfD는 독일이 자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일이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할 수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독일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회원국으로서 핵무기 개발이 국제법 위반이며, 핵 보유 시 즉각적인 국제 제재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도 자체 핵무장론이 제기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과 같은 딜레마다. 더욱이 독일은 나치 독재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력이 있다. 1945년 패망 후 미국·영국·소련(현 러시아)·프랑스 4대 전승국의 분할 점령을 거친 독일은 주권 회복 과정에서 ‘핵무기 포기’ 원칙을 수용했다.
메르츠 대표도 러시아의 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유럽 내 핵 보유국인 프랑스 및 영국과의 협력 강화를 강조했다. 총리 취임이 확실시된 가운데, 그는 첫 외국 방문지로 프랑스를 선택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만찬을 가지며 핵 억지력 문제를 논의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가 유럽 동맹국들에게 자국의 핵우산을 제공하는 ‘핵 공유’(nuclear sharing) 구상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프랑스와 영국의 핵전력은 미국이나 러시아에 비해 부족한 수준이다. 메르츠 대표 역시 이를 의식한 듯 “프랑스·영국과의 협력은 미국의 핵우산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핵무기의 완전한 대체는 불가능하지만, 최소한 보완 역할은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