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는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과 야학 운영으로 민중 계몽에 힘쓰던 청년 선각자였다. 그는 나라를 잃은 원인을 ‘무지(無知)’에서 찾으며 교육운동을 실천했다. 조국을 떠나며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겼듯, 뜻을 위해 생환을 포기한 결의는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의 의거로 이어졌다.
의거 후 체포된 그는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24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일본군은 당시 신문에 “시신을 화장했다”고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가나자와시 노다산 공동묘지 인근 쓰레기 소각장 통행로에 암매장했다. 이는 의거의 상징성을 지우려는 왜곡된 처사였다.
해방 후인 1946년 3월 6일, 현지 재일교포 박성조의 끈질긴 수소문 끝에 윤 의사의 유해는 발굴됐다. 박성조는 소학교 일본인 동창들을 찾아다니며 당시 상황을 확인했고, 헌병으로 입회했던 진노의 행적을 추적했다. 진노의 가족 증언과 함께 암장 때 독경을 했던 여승 야마모토 료도의 기억이 맞물리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가리킨 자리에서 유해가 발견됐다.
당시 윤 의사의 마지막 순간은 일본군 감시병들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그는 형틀로 걸어가며 염불 같은 말을 읊조렸고, 눈가리개조차 거부하며 태연하게 최후를 맞았다. 감시병 진노는 훗날 “주눅들기는커녕 일본 역사에도 이름이 남게 되었으니 만족한다는 말을 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그는 독일어로 “빨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청년의 결연한 죽음은 일본 군인들의 시선조차 압도했으며, 해방 후 암매장의 땅을 뚫고 다시 드러난 유해는 ‘장부의 맹세’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