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기와 국제 유가 폭등이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역대 최대 규모 비축유 방출’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일본 정부는 16일 관보를 통해 민간 비축유 방출을 공식화하며 본격적인 공급 확대에 나섰다. 이번 조치의 핵심은 석유비축법에 의무화된 민간 정유사와 상사의 비축 의무량을 기존 ‘국내 소비량 70일분’에서 ’55일분’으로 15일치 하향 조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시장에는 즉각 약 15일 분량의 원유가 풀리게 된다.
또한 일본 정부는 이달 하순부터 국가 비축유 약 30일분까지 추가로 방출할 계획이다. 민간과 국가 물량을 합친 총 방출 규모는 약 8,000만 배럴(45일분)로, 이는 1970년대 현행 비축 제도가 도입된 이후 7번째이자 역대 최대 규모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발동된 이후 약 4년 만의 비상 조치다.
일본 정부가 이토록 기민하게 움직인 배경에는 심상치 않은 국제 유가 추이가 있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여파로 국제 유가의 기준점인 북해 브렌트유(5월 인도분) 가격은 16일 오전 배럴당 104.70달러를 기록하며 100달러 선을 훌쩍 넘어섰다. 직전 거래일 대비 1.5% 급등한 수치다.
일본은 에너지 안보 면에서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다. 전체 원유 수입량의 90% 이상을 중동 지역에 의존하고 있어,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 사실상 ‘에너지 고립’ 상태에 빠진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IEA의 결정이 내려지기도 전인 지난 11일에 이미 방출 계획을 발표한 것 역시, 중동 사태 장기화 시 발생할 수 있는 산업계 타격과 인플레이션 공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현재 일본의 비축유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약 4억 7,000만 배럴로, 전체 소비량의 254일치에 해당한다. 유형별로는 국가 비축 146일분, 민간 비축 101일분, 산유국 공동 비축 7일분이다. 수치상으로는 8개월 이상 버틸 수 있는 양이지만 전문가들의 시각은 낙관적이지 않다.
시장에서는 이번 45일분 방출이 단기적인 심리 안정 효과는 거둘 수 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중동 분쟁이 6개월 이상 장기화될 경우 비축유 소진 속도가 빨라지면서 실질적인 물량 부족 사태가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방출은 일본 정부가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유가 폭등세를 누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중동 의존도가 높은 일본 경제가 직면한 에너지 안보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