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무역 확산과 글로벌 분절이 고착화되는 상황에서 한일 경제연대가 생존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한국과 일본이 더 이상 규칙을 따르는 국가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함께 규칙을 만드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최 회장이 제시하는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밸류체인을 공유하고, 저성장·고령화라는 구조적 위기에 동시에 직면한 한국과 일본이 각자도생으로는 불확실성의 파고를 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협력 수준을 넘어선 연대와 공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실제 최 회장은 에너지, 의료, 스타트업, 관광을 한일 경제연대의 핵심 분야로 꼽아왔다. 이 가운데서도 에너지와 의료 협력에 가장 큰 비중을 둔다. 두 나라 모두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아 공동 구매와 저장, 운용 체계를 구축할 경우 비용 절감 효과가 크다는 이유에서다. 고령화로 급증하는 의료비 문제 역시 일부 상호 인정과 시스템 공유를 통해 사회적 부담을 낮출 수 있다는 논리다.
이 같은 메시지는 지난해 일본 도쿄대 야스다 강당에서 열린 도쿄포럼 비즈니스 리더 세션에서도 반복됐다. 당시 최 회장은 에너지 공동 운용과 의료 협력의 실질적 효과를 언급하며 한일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자리에는 후지이 테루오 도쿄대 총장과 이와이 무츠오 일본경제동우회 회장대행이 함께했다.
최 회장은 한일 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에서도 같은 입장을 재확인했다. 에너지 공동 구매, 저출생·고령화 대응을 위한 의료 시스템 연계를 통해 양국이 경제적·사회적 비용을 동시에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자료에 따르면 글로벌 LNG 수입 시장에서 일본과 한국의 점유율을 합치면 27%에 달한다. 단일 국가 기준 세계 최대 고객인 중국을 웃도는 규모다. 협력 여부에 따라 협상력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계산이다.
최 회장이 한일 경제연대를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2023년 무렵이다. 이후 EU 수준의 경제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하며, 대외 협상력 강화와 표준·규칙 선점을 강조해왔다. 지정학적 긴장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각국이 블록화된 시장과 규칙을 만들어가는 만큼, 한일 역시 공동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재계 전반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매출 상위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과반 이상이 향후 한국 경제 성장을 위해 한일 경제협력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반도체와 AI가 가장 유망한 협력 분야로 꼽혔고, 자동차와 바이오·헬스케어, 조선과 배터리 산업이 뒤를 이었다. 보호무역과 통상 이슈에 대한 공동 대응 역시 주요 협력 방식으로 지목됐다.
중소기업의 시각은 다소 복합적이다. 경쟁 부담으로 인해 대기업에 비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일본 수출 기업을 중심으로는 협력 확대에 대한 기대가 높다. 수출 확대와 원·부자재 공급 안정이 가장 큰 기대 효과로 나타났다.
최태원 회장의 메시지는 단순한 협력 제안을 넘어선다. 갈라진 세계 경제 속에서 한일이 연대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규칙을 따르는 위치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함께 규칙을 설계하는 주체로 나설 것인지. 최 회장이 던진 질문은 이제 재계와 정책 당국 모두가 답해야 할 과제가 되고 있다.